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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 (15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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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는 158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이자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8년 이에야스의 양자가 되어 마쓰다이라 성을 하사받았고, 1592년 형의 사망 이후 가문을 계승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고, 쓰쿠데 번, 이세카메야마 번을 거쳐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오사카 성을 받았다. 오사카 번주로서 도시 재건에 힘썼으며, 고리야마 번, 히메지 번을 거쳐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를 도왔다. 1644년 에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오시 번의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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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 (1583년)
기본 정보
이름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
국적일본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 상 (묘신지 탑두 덴쇼인 소장)
출생1583년
출생지미카와국
사망1644년 5월 1일
사망지무사시국에도
법명겐테쓰
계명덴쇼인 신간 겐테쓰 대거사
묘소와카야마현고야정고야산의 주세이인
다른 이름쓰루마쓰마루 (유명)
마쓰다이라 기요마사
다다아키라
오쿠다이라 다다아키라
씨족오쿠다이라 씨 ->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가족아버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어머니: 가메히메
양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형제자매오쿠다이라 이에마사
이에하루
오쿠다이라 다다마사
다다아키라
오쿠보 다다쓰네 정실
관직
관위종4위하
시종
수령시모사노카미
경력
섬긴 막부에도 막부다이세이산요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
봉록미카와사쿠테 번 번주
이세가메야마 번 번주
셋쓰오사카 번 번주
야마토국고리야마 번 번주
하리마히메지 번 번주
히메지 번주1대 (오쿠다이라-마쓰다이라 가문)
재임 시작1639년
재임 종료1644년
이전혼다 마사카쓰
이후마쓰다이라 다다히로
가족 관계
배우자정실: 오다 노부카네 딸
계실: 고이데 요시마사 딸
자녀다다히로
기요미치
무리
우메코
미치코
이누코
이자
만코

2. 생애

158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에야스의 장녀 카메히메이며, 이에야스의 외손자이다.

1588년 이에야스의 양자가 되어 마쓰다이라 성을 받았다. 1592년 형 마쓰다이라 이에하루가 사망하자 가문을 계승하여 고즈케국 나가네 영지(7,000)를 받았다. 1599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서 '충(忠)'자를 받아 이름을 다다아키라로 고쳤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 아버지와 함께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했다. 1602년 쓰쿠데 번을 받아 영지가 17,000으로 늘어났다. 1610년 이세카메야마 번으로 옮겨 영지가 약 50,000으로 증가했다.

1614년 오사카 전투에서 미노 국의 여러 다이묘를 이끌고 오사카 성 외호와 내호 매립 봉행을 담당했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 이후 셋쓰국 오사카 번 10만 석의 번주가 되어 전재 복구에 힘썼으며, 도톤보리 운하 개착을 포상했다.

1619년 야마토국 고리야마 번(12만 석), 히메지 번(18만 석)으로 차례로 이동했다. 만년에는 도쿠가와 막부 통치를 도왔으며, 1626년에는 종사위하 시종에 서위, 임관되었다. 1632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고, 1639년 하리마 히메지 번으로 옮겨져 서국탐대로 불렸다.

1644년 에도 번저에서 사망했으며, 향년 62세였다. 장남 다다히로가 뒤를 이었다.

2. 1. 출생과 가계

1583년(덴쇼 1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에야스의 장녀 카메히메로, 이에야스의 외손자이다.

1588년 (덴쇼 16년) 이에야스의 양자가 되어 마쓰다이라 성을 받았다. 처음 이름은 기요타다였다.[2] 1592년(분로쿠 원년) 형 이에하루가 사망하여 그 가문을 잇고 고즈케국 나가네에 7,000을 받았다. 1599년(게이초 4년) 3월 11일, 숙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서 '충(忠)' 자를 받아 다다아키라로 이름을 바꿨다.

2. 2. 초기 경력

1583년(덴쇼 1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에야스의 장녀 카메히메로, 이에야스의 외손자였다.[2]

1588년(덴쇼 16년) 이에야스의 양자가 되어 마쓰다이라 성을 받았다. 처음 이름은 기요타다였다.[2] 1592년(분로쿠 원년) 형 이에하루가 사망하여 그 가문을 잇고 고즈케국 나가네에 7000석을 받았다. 1599년(게이초 4년) 3월 11일, 숙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서 '충(忠)' 자를 받아 다다아키라로 이름을 바꿨다.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도쿠가와 측에 참전했다. 1602년(게이초 7년) 9월, 미카와국 쓰쿠데 번의 번주가 되어 영지가 17,000석으로 늘어났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와 쓰쿠데 번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다다아키는 아버지와 함께 도쿠가와 측에 참전했다.[2]

1602년 말, 쓰쿠데 번을 받아 영지 규모가 17,000 다이묘가 되었다. (이전에는 7,000석 이었으나, 10,000석이 증가함)[1] 1610년에는 이세카메야마 번으로 옮겨 영지 규모가 약 50,000 으로 증가했다.[1]

2. 4. 이세카메야마 번과 오사카 전투

게이초 15년(1610년) 7월 27일, 이세카메야마 번 5만 석에 추가 봉해졌으며, 이때 쓰쿠데 번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같은 날 형이자 미노국 가노 번주 오쿠다이라 타다마사에게도 4만 석이 추가되었다.[2] 게이초 17년(1612년) 3월 26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이시비야 12정, 오테포 12정, 철포 300정, 300자루, 활, 번 구소쿠 수백 벌을 받았다.[2]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가 발발하자, 다다아키라는 처음에는 혼다 타다마사와 함께 이세 국의 여러 다이묘를 이끌 예정이었다.[2] 그러나 이 군령이 슨푸에서 발령된 같은 날, 미노 국의 여러 다이묘를 이끌어야 할 형 타다마사가 급사하였다.[2] 이에 따라 가노 번에서는 아버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에 의한 대참진 없이 병사만 다다아키라의 지휘 하에 보내졌고, 다다아키라가 대신 미노의 여러 장수를 이끌고 가와치구 방면의 대장이 되었다.[2] 다다아키라의 동원 병력이 이세 카메야마의 영지분보다 이례적으로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2] 겨울 전투 중에는 센바에 진을 치고 기병 구축을 하였으며, 12월 14일에는 이에야스가 다다아키라를 불러 기병 구축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2] 도요토미 가문과 강화가 맺어진 후에는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오사카 성 외호・내호 매립 봉행을 담당했다.[2]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겨울 전투와 마찬가지로 미노 국의 여러 다이묘를 이끌고 야마토지 세 삼조 대장으로 도묘지・호다 전투,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에 참가했다.[2] 종전 후, 오사카 전투에서의 전공이 고려되어 이에야스의 특명으로 셋쓰국 오사카 번 10만 석의 번주가 되어 전재 복구에 힘썼다.[2] 오사카 전투에서 다다아키라의 전공은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겨울 전투 강화 후의 매립을 평가받은 것으로 보인다.[2] 또한 측실을 많이 거느리고, 이에야스에게 청하여 센히메의 시녀도 측실로 삼았다.[2]

전쟁 중에 중단되었던 운하 개착이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재개되어 완성되자 이를 포상했는데, 이 운하를 도톤보리라고 불렀다고 한다.[2]

2. 5. 오사카 번주 시대와 도시 재건

1614년 오사카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명으로 오사카 성 외호와 내호 매립 봉행을 담당했다.[1]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 이후, 오사카 번 10만 석의 번주가 되어 전재 복구에 힘썼다.

도톤보리 운하 개착을 포상하고,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운하 개착을 재개하도록 지원했다.[2] 겐나 5년(1619년) 고리야마 번으로 이봉되기 전까지 4년간 오사카 성 재건과 도시 정비에 힘썼다.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의 오사카 통치 시대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항목내용
오사카 성 산노마루 훼멸 및 시가지 개방히데요시 만년의 공사로 완성된 산노마루를 훼멸하고 시가지를 개방
교토 상인 이주교토 후시미 상인들을 오사카로 이주
강 개착교마치보리강, 에도보리강, 도톤보리강 개착
사찰 및 묘지 관리사찰 및 묘지 이전 및 폐합
겐다이슈 임명소토시요리(겐다이슈)를 임명하고 시중 정할(町割) 시행
수장(水帳) 제정수장(水帳) 제정 및 시중 제도화



다다아키라는 도요토미 시대에 건설된 오사카를 기반으로 지배 기구를 강화하고 시가지 확대를 추진했다. 특히 교마치보리강, 에도보리강, 도톤보리강 개착은 니시요코보리강 서쪽의 "게센바(니시센바(西船場))" 지구와 센바 남쪽 "시마노우치" 개발을 목표로 했다.

이후 막부 직할령 시대에도 아와보리강, 아마보리강, 나가호리강, 다치우리보리강, 사쓰마보리강, 아지가와, 호리에강, 나니와이리보리강, 다카쓰이리보리강 등이 개착되었다. 그 결과, 우에마치(우치마치, 히가시센바(東船場)), 센바, 덴마 외에 게센바, 시마노우치, 도톤보리, 호리에, 나니와 신치, 니시타카쓰 신치 등이 정(町)화되어 간에이 시대(1624년 - 1644년)에 "오사카 삼향"이 성립되었다. 오사카 삼향은 "덴마구미"(덴마), "키타구미"(센바 북반), "미나미구미"(센바 남반과 시마노우치)를 지칭하며, 각 구미에는 "소카이쇼"(킨세이 오사카의 소토시요리가 머물던 관청)가 설치되어 하위 조직인 정들을 통괄했다.

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 성 재건 공사는 1620년부터 1628년경까지 진행되었으며, 이는 에도 성과 같이 여러 나라 다이묘에게 노동력을 징발하는 "텐카후신"으로 이루어졌다.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의 약 2배 규모를 목표로 한 대규모 공사였다.

2. 6. 고리야마 번, 히메지 번과 막정 참여

1619년, 다다아키라는 야마토국의 고리야마 번(12만 )으로 이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메지 번(18만 )으로 다시 이동했다.[1] 만년에는 태동하는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를 도왔다.[1]

겐나 5년(1619년)에 고리야마 번 12만 석으로 영지가 더해져 이동되었다. 간에이 3년(1626년) 7월에는 사촌이자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함께 상락하여, 8월 19일에는 종사위하・시종에 서위・임관되었다. 고리야마 번주 시대에는 단기간, 검술의 달인 아라키 마타에몬이 수행하기도 했다.

간에이 9년(1632년) 1월 30일, 오고쇼 히데타다의 유언으로 오미 국히코네 번 주 이이 나오타카와 함께 이에미쓰의 후견인(타이세이 산요)으로 임명되었으며, 간에이 16년(1639년) 3월 3일에는 하리마 히메지 번 18만 석으로 영지가 더해져 이동되어 서국 탐대(西国探題)로 의거되는 등, 에도 막부의 숙로로서 위세를 떨쳤다.

2. 7. 사망

1644년 3월 25일, 에도 번저에서 사망했다. 향년 62세. 뒤는 장남 다다히로가 이었다.[1]

3. 인물과 평가


  •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쇼군가에 반역이 발생할 경우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에게 후사를 부탁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쇼군이 되자, 다다아키라는 숙로로서 이이 나오타카와 함께 막정에 참여했다.
  • 고세 호안이 오다 노부나가 공기를 대중을 위해 각색한 노부나가기의 영향을 받아 당대기를 저술했으나, 신빙성에 불확실한 부분도 많다.
  • 오사카 전투에서 충성을 다했다고 전해지는 라이쿠니미쓰 (규슈 국립 박물관 소장)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3]

4. 연보

5. 가계

항목내용
실부오쿠다이라 노부마사
실모카메히메
양부도쿠가와 이에야스
정실오다 노부카네의 딸
계실코이데 요시마사의 딸
측실
자녀


참조

[1] 서적 Economic Institutional Change in Tokugawa Japan: Ōsaka and the Kinai cotton trade https://books.google[...] 1974
[2] 사전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
[3] 웹사이트 e国宝「太刀 銘来国光」 https://emuseum.n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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